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세대 사태 (문단 편집) == 경위 ==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082100329102006&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8-21&officeId=00032&pageNo=2&printNo=15859&publishType=00010|연세대 한총련 사태 일지 (1996년 8월 21일 경향신문 기사)]]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범청학련 남측본부, 한총련 등이 주축이 된 '제7차 범민족대회 추진위원회'는 [[광복절]]을 기념하여 제7차 8.15 범민족대회[* 범민련 탄생 몇달 전인 1990년 8월부터 시작하여 1999년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되었던 행사.]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범청학련 결성 1년 전인 1991년부터 시작되어 2000년까지 총 10회에 걸쳐 개최했다.] 남측 행사를 [[연세대학교]]에서 개최하고자 했고 그 준비작업으로 '범청학련 통일선봉대'를 만들어 8월 4일부터 동/서로 나눠서 5일간 가두선전전을 전개 후 서울시내 각 대학에 분산해 있다가 15일 새벽 연세대로 집결했다. 이미 경찰 측은 8월 11일 전의경 20개 중대 2천여 명을 풀어 행사장 예정지인 연세대학교를 봉쇄하기 시작했고 대학생 4천여명이 연세대로 집결하자 다음날 양측 간 충돌이 처음 벌어졌다. 13일 [[김우석(1936)|김우석]] [[행정안전부장관|내무장관]]과 [[안우만]] [[법무부장관|법무장관]], [[안병영]] [[교육부장관|교육장관]] 3명은 합동담화문을 통해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이적집회로 규정하고 불법 폭력시위에 강력 대처한다는 입장을 표했고 한국자유총연맹 등 호국/안보 관련 시민사회단체들도 정부 차원의 강경 대응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경찰도 한총련의 집회가 사회 혼란 및 국민의 불안을 가중시킨다고 판단하여 조기 진압 방침을 세워 연세대 종합관 주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구급차를 대기시키는 등 사전 안전조치를 취하며 경찰력도 그쪽으로 투입했다. 예전 같았으면 한총련 지도부는 대회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정부의 '개량주의 국면'을 돌파하려는 심리가 강해 13일에는 통일대축전 전야제, 14일엔 개막까지 강행했다. 또 대회 전에 도종화(연세대 공대), 유세홍(조선대 치대) 등 학생 2명이 북한 평양으로 파견되어 정부와 한총련 간 긴장감은 더해갔다. 그러나 8월 14일까지 연세대에는 각지에서 2만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 1만여명은 [[한양대]], [[홍익대]], [[동국대]] 등에서 산발적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5BB%25E7%25C1%25F82-5-1.jpg]] [youtube(raIUECVwxAw)] [youtube(XBbfCX2WPTk)] [*주의 의경이 인질로 잡혀서 폭행당하는 장면이 있으니 주의 바람] 1990년과 1991년에 시작된 8.15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 행사가 각각 7회와 6회까지 이르는 동안 [[경찰]]은 그동안 시위대가 거리로 진출하는 것은 막았으나 실제 집회가 열리는 행사장(대학 내) 내로 진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례적으로 [[연세대학교]]에서는 8월 14일 낮 들어 경찰은 연세대에 대규모 병력과 헬기를 투입해 행사장에 있던 참가 학생 3천여 명을 강제해산시켰다. 경찰측이 학생시위 과정에서 헬기를 동원한 것은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과 1994년 서울대에서 열린 제5차 범민족대회 이후 세 번째이다. 경찰은 2시 45분경에 학생들이 남북학생 연석회의를 강행하자 전경 51개 중대 6천여 명과 헬기 11대를 동원해 다연발 최루탄을 쏘고 공중에서 최루액을 뿌리면서 정문, 북문, 동문 쪽으로 진입작전(1차)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수대]]들이 서둘러 폐타이어, 의자 등으로 쳐 놓은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후 경찰은 진압작전에 나선 지 40분만인 3시 20분경에 포크레인 등 중장비와 소방차 등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제거하고 행사장인 노천극장과 이공대 대강당 등에서 해산작전을 폈다. 경찰은 이미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학생회관, 대강당 등에 대한 수색을 벌인 뒤 4시 17분경에 철수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 5천여 명은 5시 20분경부터 [[신촌]]로터리 주변에 모여 차도 3백여 미터 구간을 완전 점거하고 화염병 시위를 벌이는 등 도심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이 중 2천여 명은 다시 연세대로 돌아가는 등 학생 6천여 명이 시내 6개 대학에 분산해 밤샘 농성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신촌은 물론 마포, 광화문 등 서울 강북 지역의 교통이 거의 마비될 정도였다. 이에 [[경찰]]측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로부터 [[전투경찰순경|전경]]을 증원하여 총병력 5만여명[* 확실한 집계는 아니다. 다만 당시 [[전투경찰순경|전]][[경찰청 의무경찰|의경]]으로 진압에 투입됐던 군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교통중대나 행정보조 같은 시위진압을 하곤 거리가 먼 소위 [[꿀보직]] [[전투경찰순경|전]][[경찰청 의무경찰|의경]]들까지 죄다 긁어모아서 잡탕 중대를 만들어 투입시켰다고 한다. 아마 그해 여름 서울에 전국의 [[전투경찰순경|전]][[경찰청 의무경찰|의경]]이 다 모였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이 되었고 8월 15일 10시 30분경부터 2차 진입작전을 시작했는데 이때 최루액 3천리터와 헬기 12대 불도저 등 중장비를 동원하여 정문을 뜯어내고 진입을 시작하였다. 11시 45분경부터는 서문으로도 진입에 성공하며 학생들을 압박하였으나 정문과 서문의 운동장을 중심으로 대치하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했다. 8월 15일 야간에는 서치라이트와 조명탄을 쏘며 3차 진입을 시도하였는데 야간 진압은 대형 참사의 위험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도 하지 않는 이례적인 작전이었다.[* 야간진압은 위험도도 높아서 앞선 1994년 5차 범민족대회에서 야간 진압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경찰]]측의 강력한 진입 시도에 한총련 측은 15일 오후 모든 일정 종료와 다음날 8월 16일 행사(거리 집회)에 대한 취소를 선포하고 참가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날 [[청와대]]에서는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81700289101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8-17&officeId=00028&pageNo=1&printNo=2647&publishType=00010|수석비서관회의를 열어]] 폭력행위자 등을 전원 구속해 엄중 사법처리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날 고위 당직자 회의에서 내무부장관 김우석은 "한총련이 5.18 관련자의 최고형 선고, 국가보안법 철폐, 북-미 평화협정 등을 이슈로 불법폭력시위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며 한총련 관련 수배자들을 전부 검거해서 한총련을 와해시킨다고 밝혔으며 "앞으로 이적행위자와 불법폭력 시위자는 전원 검거해 의법조치하겠다."라고 한 뒤 입체진압기술을 개발해내 폭력시위에 대한 진압능력을 높이겠다며 강경 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8월 16일 19시부터 [[경찰]]은 [[전투경찰순경|전경]] 110개 중대 1만 3천명으로 외곽을 봉쇄 후 50개 중대 6천여명의 [[전투경찰순경|전경]]과 경찰특공대 36명, 조명차 4대, 조명탄 4천여발, 그물 60개, 고가사다리 2개 등의 병력과 장비로 4차 진입을 시도하여 학생회관과 서문 운동장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외신 등 언론이 지켜보는 상태에서 야간 진압은 포기하고 8월 17일 0시를 기해 연세대 내에서 퇴각했다. 날이 새고 같은 날 11시 30분부터 헬기 7대로 최루액을 뿌리면서 [[전투경찰순경|전경]] 100여개 중대 1만 2천명이 5차 진입 작업을 시작하여 이 때부터 대부분의 학생은 이과대와 종합관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박병언 당시 서총련 의장 겸 연세대 총학생회장[*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은 "농성까지는 정말 생각치 못해 준비도 못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며, 설사 해산하고 싶어도 경찰 봉쇄로 그럴 수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학생측은 계속해서 안전귀가를 요구하고 시민단체들은 음식물과 약품 및 여성용품들의 전달을 요구했으나 [[경찰]]측은 이를 거부하고 단전/단수 의사까지 표명하면서 의료단체의 방문도 제지하였다. 이어 [[최병국(1942)|최병국]] 대검찰청 공안부장은 [[https://imnews.imbc.com/replay/1996/nwdesk/article/2010082_30711.html|기자회견]]에서 "한총련이 그 동안 계속해 온 친북, 이적활동이 국가안전과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하며 이 사태를 주도한 한총련 간부들에 대해 모두 사법처리하여 한총련 자체를 와해시키겠다고 방침을 밝혔다. 이전까지는 대학생들이 과격 시위를 할 때마다 정부가 주동자 검거와 배후세력 차단을 위한 강경 방침을 거듭 발표해 왔지만 [[학생회]] 조직 자체의 무력화를 목표로 사법처리 방침이 결정된 전례는 없었다. 같은 날 경찰은 고려대 등 한총련 본부 및 지역총련 사무실이 있는 8개 대학에 압수수색을 실시했으며 연세대 측도 정부-학생 간 중재에 나섰다.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98789_1.jpg]] 8월 18일부터는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의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경찰]]은 이들도 모두 연행하면서 단전/단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연세대 측에서 실험 기자재 등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같은 날 안병영 교육부장관은 학생들과 연세대에서 1차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학생 측이 연세대의 1차 중재안을 거부했고 시위대 중 학생 15명이 탈진/자수로 이탈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8월 18일까지 검/경은 54명을 구속하고 시위가담자 1천 7백여명을 연행한 뒤 시위 가담 정도를 분류했다. 연행자 숫자로만 보면 이는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건대항쟁]] 당시 검거된 1,526명을 훌쩍 뛰어넘은 수다. 이후 검찰은 지난달 말부터 이미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명기 의장 등 한총련 간부 36명을 조속히 검거하기 위해 전담 검거반을 보강키로 하는 등 한총련 와해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다. [[파일:external/cfs11.tistory.com/493ae58d27743?.jpg]] [youtube(Mr6dTtM0Nsg)] 8월 19일 연세대학교에는 해양경찰의 해양헬기가 등장했다. 강력한 프로펠러 바람으로 종합관과 이과대 옥상에 있던 학생들을 위협하며 대량의 최루액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같은 날 이수성 총리는 주동자/극렬시위자 엄단 및 단순가담자 관용을 요지로 한 담화를 발표했고 [[박일용]] 경찰청장은 이 날 "시위대에 대한 총기 사용"을 검토한다고 언급했으며 [[김수한]] 국회의장은 <월간조선> 9월호 인터뷰에서 대통령 중임제 개헌의 지론을 발표했다. 8월 20일 4시 20분부터 [[경찰]]은 병력 배치를 시작하여 5시 50분부터 종합관에 [[전투경찰순경|전경]] 16개 중대 2천여명을 투입했다.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입하여 종합관 1층에서는 5시 56분경부터 화재가 발생하는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하마터면 2009년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똑같은 이유로 일어날 뻔했다.] 학생들은 화재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고 7시 37분 종합관 진압이 종료되었지만 종합관 진압 중 시위 진압에 참가했던 김종희 일경(당시 20세)이 시위대가 던진 보도블럭 원판에 맞아 중태에 빠졌고 결국 이틀 뒤에 병상에서 사망했다. 반면 이과대는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화염병, 돌, 의자 등을 던지면서 학생들이 격렬히 저항했고 학생 2천여명은 10시경 한총련 기자회견을 틈타 건물 뒷산을 타고 달아났으나 이 중 1천 43명이 연희동 주택가 등지에서 연행되었다.[* 학생들은 민주화투쟁 시기처럼 시민들이 도와주고 숨겨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각 가정이 문을 잠그고 받아 주지 않는 바람에 주택 옥상과 골목으로 도망다니다가 붙잡혔다. ] [youtube(4Myvy6rjQUI)] 8월 20일에 연행된 학생은 3,499명이며 8월 12일부터 20일까지는 총 5,848명을 연행하여 총 462명을 구속하고 3,341명을 불구속입건, 373명을 즉심에 넘기고 1,672명을 훈방했다. 구속자 462명 중 진압작전 이전에 구속된 사람이 93명, 진압 당시 연행자 중 구속된 사람이 369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